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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07)


521. " 흠.... 좀.... 좀 쉬고 있었어. " 이것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돌릴 겸....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서.... 민희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긴 했으니까. 말 그대로.... 쉬는 중이긴 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민희의 질문에 어려운 고개가 다시 한 번 찾아왔다. " 응? 뭐... 했어? 얼마나 힘든 일을 했길래 쉬고 있었어.....? " 걱정이 담뿍 느껴지는 말투. 하지만 오히려 그런 민희의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힘든 일은 커녕.... 아침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끼니조차 챙겨 먹지 않고.... 만만한 물이나 마시면서 간신히.... 목이나 축였을 뿐이었다. " 힘든 일은 무슨..... 그냥 청소... 청소했어. " 처음엔 설거지 했다고 하려 했는데.... 이것도 맞는 대답이 아닌 거 같아서 급하게 바꿨다. 사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나는 혼자 있어도 잘 먹고 잘 지냈다.... 이런 식으로 비춰지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은 오버스러운 걱정 속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 훗.... 뭐야, 오빠.... 무슨 청소를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해? 완전 오빠네... 반짝반짝 빛나는 거 아냐? 후훗..... " " 윽... 그 정도는 아니야.... " 이렇게 낡아빠진 집이 아무리 청소 한다고 해서 반짝반짝 거릴 리는 없었다. 하긴... 되돌아보면.... 이런 집도 잠시.... 눈부시게 반짝였던 적이 있긴 했었다. 함께... 아버지 기다리면서 저녁을 만들었던.... 민희가 있었던 그 시간..... 추억이 보정을 받아서 반짝거리는 거라 해도.... 뇌리 깊숙한 곳에서 그 시간만은.... 영원히 반짝반짝 빛이 났었다. 온통 따듯한 빛이 가득했던 집 안.... 그건 내 평생.... 보지도 못했던 시간이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던 시간.... 어린 시절..... 아직은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던 엄마가 있던 시절에도... 그렇게 따듯하게 빛이 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난 갓 태어난 병아리 일지도 모른다. 처음 사랑에 눈을 뜨고.... 그게 하필 민희였고.... 한번 새겨진 민희에 대한 마음은....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지워버리지 못하고.... 지울 수도 없는.... 절대 각인의.... 세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역시.... 난..... 너한테 벗어날 수 없어.... 서민희.....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졌다.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시간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여유가 생기니 절로 미소도 지어졌다. 그리고 내 자신도 돌아볼 수 있었다. 청소라니.... 김우태.... 정말 궁색하다 궁색해.... 어제도 청소했다고 해놓고.... 고작 말한 것이 청소라니... 민희가 피식 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름 작가라고 시나리오도 쓰고 프로그램 구성도 짜면서.... 이 정도 핑계거리도 척척 만들지 못하다니.... 정말 재능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자란 작가가 분명했다. 아무래도 다른 일거리는 찾는 것이 현명할 듯 싶었다. 그래도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기 섞인 민희의 목소리를 들으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라도 상하는 것은 아닌지.... 넋이 나간 상태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동안..... 옆에서 지켜봤던 민희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비록 힘이 없어 보이는... 김빠진... 웃음 섞인 목소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많은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 오빠..... " 첨엔 듣지 못했다. 그만큼 민희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래서 그런지... 곧 이어서 나온.... 좀 더 커진 그녀의 목소리가 날 흔들었다. " 우태 오빠....!? " " 으응??? " 얼마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을까. 아무튼.... 반사적으로 대꾸하는데.... " 우..태 오빠..... " 이름까지 붙여서 다시 부르는 민희. 이건 무언가 부탁하고 싶을 때 나오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길게 말이 늘어지면서 점점 느려지는 말투. 그리고.... 이름을 붙여서.... 날 부르는.... 오빠란 단어. 아마 마주 보는 상황이었다면.... 그녀의 큰 눈이 연신 깜빡거리며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맑은 빛으로.... 마치 그 눈동자에 내가 보일 듯.... 촉촉이 젖은 상태에서.... 바라보며 나를 응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다. " 응? 왜에? " 나 또한 자연스럽게 말이 늘어졌다. 예전의 기억에 젖어서.... 눈도 가늘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피어나는데.... 그녀의 다음 말에 움찔.... 따스함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 오빠... 울 아빠....한테 인사 드리러 올래? " 뭐???? 듣자마자 깜짝 놀랬다.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한 듯 싶었지만.... 실제는 다행스럽게 목소리로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희의 목소리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 울 아빠... 마지막 가는 길이잖아.... 아침에 발인하기 전에.... 오빠.... 인사 드리러 오지 않을래? " ************** 날씨라는 건 변화무쌍하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처럼 그 문구를 마음 깊이 느끼는 건 간만이었다. 집안에서 내내 바라본 하늘은 구름도 별로 보이지 않는 맑은 옥색이었는데 고작 몇 시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은 회색이 더 많이 보이는 흐린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우중충한 회색이 점점 넓게 세력을 넓혀가는 것이 우태의 마음 또한 비슷한 색으로 물들이는 듯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발길이 향하는 곳 또한 그런 무거운 기분에 일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화려한 디자인으로 깔끔하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은 나름 유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대학 병원이라는 글씨가 붙어서 보고 있는 우태의 뇌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병원. 병원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는 존재이긴 했다. 몸이 아파서 가는 곳이 병원인데 어찌 즐거울 수 있을까. 물론 우태가 살아오면서 크게 아파본 적이 없었고 가까운 사람들이 중한 병으로 환자가 되어 병원에 있었던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살아가는 동안 멀리 거리를 두고 싶은 곳이 바로 병원이었다. 특히 가려는 목적지는 병원 안에 있는 장례식장 아니었던가. 돌아가신 분을 만나러 가는 자리이다 보니.....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까지 오면서.... 오는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괜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민희의 목소리가 오게 된 계기가 되었긴 했지만.... 마음을 정한 뒤엔 단 한 번도 되돌릴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래.... 민희의 아버지잖아. 인사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생각해보니.... 우태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민희가 몰래 와서 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왔을 때.... 시간에 맞춰서 민희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마치 자신이 민희의 결혼식을 몰래 지켜봤던 것처럼.... 말이다. 민희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우태의 마음에 단단한 기둥이 세워지는 듯 싶었다. 그것이 생각 속에서 느려졌던 발걸음을 다시 힘차게 내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병원 입구를 빠르게 지나가자마자 이내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 늦은 시간.... 무슨 아픈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북적이는 로비를 지나서 약간 구석진 곳에 있는 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서자.... 또 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이고 층계를 내려가자마자.... 긴 복도에 쭉 늘어선 화환들이 확실히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었다. 101호.... 102호.... 103호.... 칸칸이 나누어진 방들을 지나가며 홀깃 명패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처음 보이는 식장 푯말에 보이는 이름 옆 숫자가 훅 치고 들어왔다. 100세. 아마도 이 식장에 주인인 망자의 생년이었으리라. 쉽사리 볼 수 없는 숫자. 사진까지 붙어 있는 누군가의 인생을 담고 있는 숫자에.... 조금은 감탄 섞인 한숨을 소리 죽여 내쉬고는..... 다시 민희에게 받은 호실을 찾았다. 아무래도 잘못 길을 들어섰나 하는 순간...... " 오빠! " 동시에 팔을 잡는 느낌과 함께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무의식적으로 돌아간 시선 속에 가득 들어오는 얼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민희였다. 검은 상복. 여성용 한복에 흰색 머리핀을 꽂은.... 그녀의 얼굴은 약간 초취해보였다. 반가움에 우태는 옅은 미소가 입가에 피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 어...어디 있었어? 난 보지도 못했는데..... " " 훗.... 그런 거 같더라. 난 멀리서도 바로 알아봤는데.... 보자마자 오빠 뒤를 졸졸 쫓아왔는데도 전혀 모르더라? " " 그랬구나..... 여기 사람들이 많아서 보질 못했나 봐. " 미안함에 절로 뒷머리를 긁적이자 민희는 그제서야 잡은 팔을 놓고는 살짝 떨어져서 그를 살폈다. " 뭘 그리 차려입고 왔어? 그냥 가볍게 와도 되는데..... " 잔잔한 미소와 함께 가늘어지는 눈. 애잔함이 느껴지는 말투. 장례식장으로 들어갈 때 보여주던.... 민희의 얼굴이었다. 우태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 차려입고 온 건 아닌데..... 서둘러 오느라 그냥 보이는 것 입고 왔어. " 물론....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자리도 자리인 만큼..... 최대한 상갓집에 어울리는 옷 중 괜찮은 것으로.... 골라 입고 왔다. 일종의 전투복이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 있을 얼굴들.... 또 쏟아질 시선을 생각하면.... 절로 단단히 차려입을 수 밖에 없었다. " 알았어... 훗.... 가자, 오빠. " 민희는 가볍게 우태의 등을 두들기고는 앞서 걸었다. 작은 뒷모습. 쪽진 그녀의 뒷머리를 보며 걷는데.... 왠지 민희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듯 싶었다. 그렇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닌데.... 역시 찬찬히 다시 보니.... 조금은 긴장하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하긴.... 어쩜.... 당연한 것이지도.... 예전의 민희를 생각한다면 지금 이 모습.... 이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을 모습이긴 했다. 이런 대담한 일을 할 민희는 전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곳에 오라는 그녀의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다시 되묻지 않았던가. 그러나 민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우태의 집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던 그 저녁 시간부터.... 이미 마음을 굳혔기에 지금의 시간이 있는 것인지도. 그러고 보면 이게 민희였다.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모습. 익숙한 기억 속 민희의 모습이기도 했다. 변한 것이 아니야. 원래.... 민희였던 거야. 우태는 옆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란히 걸었다. 손바닥 아래.... 민희의 체온이 느껴졌다. 아까 보았던 떨림도 어느새 사라지고.... 옆에서 들리는 민희의 숨소리도.... 평온을 찾았다. 그렇게 함께 걷던 둘의 걸음은 또 오래 가지 못해 멈춰 섰다. 거의 동시에 멈춘 우태와 민희 앞에 서있는 한 사람..... 약간 딱딱한 표정으로 안경을 한번 치켜들며....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석진이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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