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season1. 110. 이별, 그리고 자유(2)
season 1
110. 이별, 그리고 자유(2)
오래된 고급 주택.
초인종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두 번 와 본 게 아닌데 마치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낯선 기분이었다.
불편한 마음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알토란 같은 중견기업을 대물림하며 부를 축적하고, 권력마저 움켜쥐기 위해 삼대째 정치에 매진하고 있는 집.’
바로 기찬이 지금 들어서고 있는 김태삼 의원의 집이었다.
그 김태삼은 바로 재영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어서 오게.”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성기찬이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난 재영이 엄마예요.”
재영의 부모님은 기찬을 친절하게 잘 맞아주었다.
그리고 기찬이 내미는 선물을 기분 좋게 받았다.
“처음 뵙는 자린데 빈손으로 올 수 없어서 가져오기는 했는데, 약소합니다. 마음만 받아주세요.”
“뭘 이런 걸 들고 다니나. 사내가.”
“어머, 뭘 이런 걸 다.”
말과 다르게 표정이 좋았다.
어른들의 입맛에 딱 맞는 태도와 말투에 첫인상은 좋게 남긴 것 같았다.
그리고 기찬은 누가 봐도 잘생긴 미남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키도 크고 체격도 좋으니, 기찬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를 한참이나 보고 있게 만들었다.
재영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를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쉽게 발걸음을 안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찬은 어색해하거나 민망해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씩씩했다.
그게 또 두 분의 점수를 따고 있었다.
‘역시, 외모 잘난 건 무조건 플러스다.’
이후 기찬은 재영이 겉옷을 받아주자 욕실로 가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최대한 예를 갖추면서도 너무 애늙은이 같지는 않게 적절한 태도를 유지했다.
전생의 삶이 있으니 무척 자연스러웠다.
기찬은 그렇게 재영의 부모님과 함께 식사 시간을 보냈다.
밥 먹는 자리다 보니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또한 기찬은 불편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불편하면 사회생활 못 하지.’
이 순간만큼은 생 스무 살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게 정적이 내려앉은 식사가 끝나고 거실로 옮겨 가 차를 마셨다.
이제 본격적인 대화의 장이 열린 것이다.
“사실 재영이가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걸 얼마 전에서야 알았네.”
“나도 조금 놀랐어. 재영이가 그런 적이 없었는데, 엄마한테도 말을 안 하다니.”
처음에는 학교생활이나 전공, 미래 비전 같은 걸 묻고 답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훅 치고 들어온 말이었다.
“재영이가 신중한 성격이잖아요. 아마 저희 교제가 어른들께 말씀드려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느라 그랬을 겁니다. 본인이 확신이 생기면 그때 말씀드렸을 거예요.”
똑 부러진 대답이었다.
제 딸 성향을 정확히 언급하며 바람직한 태도를 언급했기에 특별히 더 사족이 붙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 진로 탐구에 매진해야 할 때인데, 너무 이른 연예 아니냐는 우려 정도는 표했다.
‘이때의 부모다운 건가?’
기찬도 이런 류의 부모님은 처음 접해보는지라, 간접 경험을 최대한 살렸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있는 캐릭터들이니까.
어쨌거나, 부모님의 그런 우려에 대해서는 어른에게 맞추던 지금까지와 달리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옳은 말씀이세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아직 어릴 때, 젊을 때, 한 가지라도 더 많은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기찬은 재영의 부모가 왜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 얼추 예상했다.
딸에게 헛바람 불어넣고 딴따라 만들려고 하는 질 나쁜 사내 녀석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대화를 나누면서 기찬의 그런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딸을 의심했다.
귀가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주말도 휴일도 없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집에 들어갈 때는 피곤에 절어서 들어가자마자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날 잡고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사실을 다 털어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단지 그동안 몰랐던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학가요제에 나간 것까지는 경험 삼아 그럴 수 있겠거니 했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대상을 수상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 중이라는 얘기에 충격을 받으셨단다.
“내가 하나뿐인 자식 딴따라 시키려고 뒷바라지한 게 아니다.”
그 대목에서 아버님은 아주 단호했다.
고집과 고지식함이 철철 넘치는 걸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기찬에게 지우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대화는 일반적이었지만, 대학가요제 주제로 이어지면서 급격히 냉랭해졌다.
물론 기찬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던가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설득할 수 없는 꼰대에게 굳이 말과 감정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나 재영이도 같은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냥 대학 생활의 추억이나 만들어 보자는….”
일단 동의와 수긍 후에 넌지시 의견을 섞어봤다.
“그런데, 대상을 받았어요.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은 거거든요. 그리고 제가 옆에서 보니까, 재영이, 연예계쪽으로 재능이 넘칩니다.”
그러면서 명함 하나를 내놓았다.
일전에 방송국 PD에게 받았던 명함이었다.
“책임 프로듀서가 직접 명함을 줬습니다. 제가 아닌 재영이 때문에요.”
그러면서 사랑이 넘치는 표정으로 재영을 바라봤다.
자랑스럽다는 속내를 마음껏 드러냈다.
당연히 부모님께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다.
그런 기찬의 모습에 재영은 잠깐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지웠다.
그리고 조금은 당황했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님은 그나마 강경함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아버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전투력이 상승한 것 같았다.
“내 이래서….”
못마땅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러더니 대뜸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3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부동산 운영하고 계시고요.”
밑으로 여동생 둘이 있다는 말도 했고, 연년생 여동생은 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기술직으로 일한다는 말까지 했다.
심지어 막냇동생과는 여덟 살 차이 나는 늦둥이라는 것까지 다 말했다.
‘그래야 내가 더 못마땅할 테니까.’
역시나, 기찬의 기대대로 두 분 부모님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생각할 때, 기찬의 집안은 자신들과 섞일 수 없는 하층민이었다.
대한민국의 상위 1% 족속은 아직도 조선시대 봉건제를 염원하는 이들이기에, 기꺼이 귀천을 나누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집에서 용케 자네 같은 똑똑한 아들이 나왔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통해서 기찬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전까지의 대화로 내 지식을 마음껏 뽐냈으니까.’
서울대 수석 입학에 1학년 학업 성적 우수.
교수님 추천서 등.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지표가 확실했다.
게다가 대화를 나눠 보니 여간 똑똑한 게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방면으로든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고 제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아주 영민해 보였다.
그에 반해 출신성분이 너무 빈약했다.
기찬 본인이 체고 출신에 복싱 메달리스트라는 것도 인상이 찌푸려지는데, 배경이 되는 집안도 볼품없으니 더 그랬다.
“그래서, 자네는 가수를 하겠다는 건가?”
결국 아버님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물론 기찬은 아니라고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재능이 없어서요.”
그 말에 김태삼은 참았던 인내심이 바닥났다.
“뭐? 그럼 내 딸만 광대를 시키려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삿대질하며 노여움을 터뜨렸다.
“당장 내 딸과 헤어지게! 당장!”
그러더니 휙 돌아서서 성큼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쾅.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놈, 당장 내보내!”
방 안에서도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막장 드라마의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어머님이 말했다.
“자네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는. 쯧.”
그러고는 안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당연히 한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영이 넌 네 방으로 올라가.”
쾅.
재영은 거의 울상이었다.
부모님을 한 번도 거역해 보지 않고 자란 그녀는 좌불안석이었다.
기찬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다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마. 나, 너랑 안 헤어져.”
그러고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오늘은 일단 작전상 후퇴.’
손으로는 전화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귀에 댔다.
집에 가서 전화하겠다는 소리였다.
재영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겨우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찬은 그런 재영을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였다.
귓가에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나, 이깟 걸로 너 포기 안 해. 사랑하니까.”
말하면서도 오글거렸다.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덕분에 제법 그럴듯한 연기를 펼쳤다.
재영이 감동받은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찬은 그런 재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집을 나왔다.
차에 올라탄 기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와. 배우들, 진짜 대단해. 어떻게 연기를 직업으로 갖고 살 수 있지? 휴우.”
이렇게 될 거라고 모든 걸 알고 그에 맞춰 연기했음에도 정말 손에 땀이 났다.
기분도 오락가락했다.
어쨌거나, 준비한 건 다 끝냈다.
그래서 속이 시원했다.
‘이제 난 부모님 반대로 사랑을 포기하는 비운의 남주가 되면 된다.’
어차피 재영은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
전생의 그녀가 그랬다.
연애 문제까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삶 전체가 그랬다.
‘재영이는 일단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그 맛, 잊지 못할 거야.’
그녀의 상품성과 재능을 발굴해 대중 앞에 선보인 게 기찬 자신이 됐다.
1차 목표 달성이었다.
냉정히 말해, 이제 그녀와는 볼일이 없다.
재영이 성공한 배우가 된 후, 그때 다시 보면 될 일이다.
그때는 기찬의 선견지명과 노력의 대가가 복리이자 불 듯 불어서 돌아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슬픈 이별이 필요해.’
기찬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김태삼을 자극해 사무실 집기라도 박살 나길 바라며 시동을 걸었다.
“뭐, 재영이가 보는 앞에서 손찌검이라도 당하면 더 좋고. 훗.”
일을 잘 마쳤더니, 갑자기 섹스가 고파졌다.
“대표님한테 박고 싶은데.”
부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