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season2. 15. 각자의 셈법(1)
season 2
15. 각자의 셈법(1)
기찬은 혜수의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그녀의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부끄러움이든, 불쾌함이든, 아니면 의문이든.
하다못해 왜 내 가슴을 보냐며 따지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것도 아닌 텅 빈 눈이었다.
잠깐 더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기찬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대신, 모를 땐 물어본다는 자신의 기본 방침을 따르기로 했다.
“무슨 생각해?”
기찬의 뜬금없는 질문에 혜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궁금해하고 있었어.”
“뭘?”
“네가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사람의 대화는 속삭임이었다.
주변에 다른 사내 녀석들은 두 사람에게는 관심 없이 여전히 젖소 선배와 산적 선배가 남매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유세현은 기찬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넌 또 왜? 뭐 할 말 있어?”
선배들이 있을 때 정중했던 태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원래의 기찬으로 돌아온 말투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아니, 뭐, 그냥.”
아주 잠깐의 감정 대치 끝에, 결국 세현이 눈을 깔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이 따끔거려 계속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야성에 압도당했다.
기찬은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말발로든, 피지컬로든, 공부로든.
딱 한 가지, 집안이나 돈 정도가 그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유치원생들처럼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다’라며 덤빌 수는 없었다.
‘동훈이만 있었어도….’
세현은 속으로 이를 갈며 절친의 부재를 뼈아파 했다.
그리고 오늘의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겠다고 복수를 다짐했다.
기찬은 그런 세현의 속마음이 뻔히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넌 내가 평생 날 쳐다도 못 보게 만들어 줄게.’
기찬은 기찬대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혜수에게 관심을 옮겼다.
“너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다시 차분해진 기찬의 목소리에 혜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했다.
여전히 덤덤한 그녀에게, 기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특이하단 생각 했어. 뭔가 엉뚱한 매력이 있달까? 넌 확실히 너만의 독특한 예쁨이 있는 것 같아.”
똑같은 말이라도 기분 좋게 말하는 법이 있다.
기찬은 나름의 기술을 시전했고, 의외로 그게 먹히는 것 같았다.
“예쁨? 헤에. 그런 말은 또 첨 들어보네.”
어떤 의심이나 경계심도 없이,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순박하다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다.
“나더러 예쁘다고 하는 너도 참 특이하다. 성기찬.”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예쁜 외모가 아니라는 걸 어려서부터 알았다.
스스로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부터 친구들의 놀림이 아무렇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을 말이다.
‘외모는 껍데기에 불과한 걸….’
그런데,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됐다.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남자애가 평생 못난이 소리 듣던 저에게 예쁘단다.
당연히 믿지 않았고, 설레지도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찬의 말이 아닌 시선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떨림이 손끝에서 시작됐다.
‘뭐지? 왜 이래?’
처음 느꼈다.
그의 눈동자가 무척 깊다는 걸 말이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기찬이 한 말이, 그 표정들이 전부 진심처럼 여겨졌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 눈빛에 항상 흘려버렸던 외모에 대한 표현이 처음으로 혈관 어디쯤엔가 박힌 것 같았다.
‘진짜야? 정말,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어째서인지, 마음이 되묻고 있었다.
뜻밖의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던 혜수에게, 기찬이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올 1년, 잘 부탁해. 부과대.”
그녀는 얼떨결에 기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 그래. 나도.”
영혼없는 대답과 함께, 혜수는 제 손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남자의 손을 감상하듯 바라봤다.
‘손이 무척 크구나.’
키도 크고, 손도 크고, 발도 크고, 얘는 다 크네.
그리고, 의외로 부드럽고 따뜻해.
기찬의 손을 보며,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음은 생각처럼 엉뚱하지만은 않았다.
두근.
그녀는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무의식은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손을 잡는 정도의 스킨십도 없었다는 것을.
기찬은 손을 통해 그녀의 체온과 맥박의 변화를 감지했다.
물론 정확히 어떤 감정의 변화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싫은 사람에게 보이는 반응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것에 결국 둑이 무너지거든.’
작은 균열, 사소한 바람, 젖는 줄 모르는 이슬비.
빗장을 걸어둔 마음이 열리는 것도 다르지 않다는 걸, 기찬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성에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던 혜수에게 어떤 조짐을 봤다.
* * *
오명환은 여전히 술이 약했다.
“야, 우리 2차 가자!”
기찬이 가져온 양주를 몇 잔 마시지도 못하고 벌써 혀 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그래도 기찬은 성심껏 그를 챙겼다.
“감독님, 지금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2차 갈 데가 없어요.”
그 말에 오명환이 초점 없는 눈으로 기찬을 빤히 봤다.
“너, 나 취했다고 생각하냐?”
취한 사람들이 하는 뻔한 대사에 기찬이 손사레를 쳤다.
“아니요. 우리 감독님, 절대 안 취하셨죠. 멀쩡하십니다.”
“그취, 나 멀쩡해. 이 새끼, 내가 술을 얼마나, 응? 알지?”
살짝 비틀대던 그는 기찬의 목에 팔을 두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주변에 누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기찬아. 우리, 아가씨 있는 데 가자. 너도 인마, 이제 성인인데, 이 스승님이 총각 딱지 떼 주마. 흐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기찬은 헛웃음이 났다.
‘당신이 잠든 옆에서 당신 마누라와 떡을 친 나다. 총각은 무슨….’
물론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끝까지 그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아이고, 역시 우리 감독님! 제자를 이렇게나 끔찍하게 생각해 주시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활용할 방법을 찾았다.
술집에서 취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듯, 그의 약점 하나를 만들어 둘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직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소 잡는 칼로 닭의 목을 치지 않는 것처럼, 기찬이 그에게 바라는 건 작은 성과가 아니다.
오명환이라는 그릇이 꽤 컸기에, 그에 맞는 큰 이벤트를 계획했다.
시작은 그와의 인연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엔 준비 과정부터 여러 요소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빛나는 무언가를 얻고자 했다.
그 노력과 수고로움은 전부 오명환이 할 것이다.
대한민국 복싱 레전드인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난 언제든 그의 어깨를 밟고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기찬은 감독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웨이터 하나가 다가와 자리 정리를 도와주며 기찬에게 물었다.
“콜키지 포함한 요금은 디파짓에서 결재했습니다. 영수증 바로 챙겨드릴까요?”
그의 안내에 기찬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영수증은 체크아웃 때 한 번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감독님은 객실까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기찬은 잠깐 갈등했다.
그러라고 하고 싶었지만, 오명환이 나름 유명 인사이기에 그가 취중에 무슨 실수라도 할 까봐 그냥 제가 데려가기로 했다.
“고맙지만, 제가 할게요.”
기찬이 웃는 낯으로 정중히 거절하는 순간, 오명환이 다시 헛소리를 지껄였다.
“아가씨 불러, 아가씨. 젖탱이 빵빵한 년으로, 어!”
원래 취한 놈과 함께 있으면 부끄러움과 뒤치다꺼리는 안 취한 일행 몫이다.
기찬은 웨이터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술이 워낙 약하셔서….”
의외로, 호텔 급 낮아질까 봐 언짢아해야 할 웨이터가 겨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의외인 건 그 다음이었다.
“객실로 아가씨 보내드릴까요?”
기찬의 귓가에 바람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 웨이터의 목소리에 기찬은 살짝 어리둥절했다.
‘호텔에서 그런 것도 해?’
전생에 여행가이드로 세계 곳곳의 호텔을 다 다녀봤지만, 별 네 개 이상 되는 호텔에서 성매매를 알선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지금 제안은 이 웨이터 개인의 재량일 것이다.
그렇기에 뒤따르는 의문이 있었다.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바로 해고될 텐데, 뭘 믿고 처음 보는 자신에게 저렇게 솔직하게 접근한 걸까?
그 의문을 품은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덫이다.’
누군가 오명환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걸 감추기 위해 기찬은 웨이터에게 적당히 거절했다.
“아이고, 감독님이 취중에는 농담이 과하세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그보다는 엘리베이터를 좀 잡아주시죠.”
웨이터는 잠깐 기찬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제 의도를 눈치챘나 싶어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찬은 얼른 그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와, 감독님, 겁나 무겁네. 저, 어떤 걸 타야 하죠?”
기찬이 힘든척하며 재차 엘리베이터 안내를 요청하자 그제야 웨이터는 탑승할 승강기를 잡아주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기찬은 웨이터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흘러내리는 감독을 다시 들춰 올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때에 맞춰 다시 한번 혼잣말을 흘려주었다.
“아이고, 무거워.”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감독이 무거운 건 진짜였다.
아무리 그가 힘이 좋아도, 취한 사람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무겁다.
후우우.
기찬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객실이 있는 11층 버튼을 누를 때,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실례합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찬은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아.”
상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여기는 어쩐 일이야?”
닫히는 승강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김하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