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season2. 26. 먹이사슬(2)
season 2
26. 먹이사슬(2)
기찬은 잠깐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은 전생자이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인과가 뒤틀려 전생에 겪은 세상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기찬에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내 무덤을 파는 일이 될 확률이 높다.’
회귀 후 기찬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자칫하다가는 송지연이 잘못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생에는 몰랐지만, 어쩌면 김종태 회장과 함께 사라진 누군가 중에 송지연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 돌아가는 꼴이 그랬다.
‘당시 사고 관련 기사들, 경찰, 검찰 수사보고서, 조사 보고서….’
기찬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백년의 서를 뒤졌다.
문서화된 모든 정보를 볼 수 있기에, 금방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아, 역시….’
사건 기록 어디에도 송지연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다만, 신원 미상의 20대 여성 둘이 사체로 발견되는데, 둘 다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김종태 회장의 사인과 같다.
당시 타살 의혹이 짙었던 이유는, 탐욕스러운 기업가로 악명이 높은 것과 어울리지 않게 건강관리만큼은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술, 담배도 안 하고 언제나 강건한 노익장을 과시하던, 그야말로 전직 프로 복서다운 자기관리였다.
그런 그가 마약에 손을 댔을 리가 없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어쨌거나, 기찬은 신원미상의 두 여자 중 하나가 송지연일 것으로 생각했다.
부검의의 소견서에 적힌 신체적 특징 몇 가지가 송지연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수 차례 몸을 섞어 본 사람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송지연은 김종태 회장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이며, 그 이유로 함께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그녀를 보호하려 하면, 그게 바로 개입이 되는 거다.’
기껏 자신이 계획한 어둠 세계의 주인을 찾았다 했더니, 이런 뜻밖의 리스크가 있을 줄이야.
기찬이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송지연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어떻게 되는지 나중에 확인해 봐.”
기찬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의 눈매와 입가에 그동안 본적 없던 잔악함이 맺혀있었다.
기찬을 바라볼 때의 송지연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대한민국 상위 1%를 상대로 하는 고급 텐프로의 에이스라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자신이 너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단순히 몸을 파는 수준의 직업여성이 아니다.
진짜 정체는 아직 모르겠으나, 지금 기찬이 느끼는 그녀는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파이, 딱 그 능력을 갖춘 프로였다.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당장 송지연의 신변에 대한 고민은 일단 접어도 될 것 같았다.
제 한 몸 건사할 능력은 있다고 판단했다.
새삼 쓰러져 있는 사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내가 굳이 들어오지 않았어도 될뻔했었네.’
만약 그녀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건 김종태 회장이 사고를 당할 때일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고, 직접 관여 없이 그녀를 살릴 방법을 차분히 찾아내 볼 요량이었다.
“누나. 신고는 하지 않더라도, 병원에는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기찬은 그녀에게 몇 가지 정보를 더 캐내려 했던 계획을 전부 유보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해코지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는 여자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가 괜히 오해나 감정만 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대신 우호적인 지금의 분위기에만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를 살뜰히 챙기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쟤는 어떻게 할 거야? 나중에 보는 건 보는 거고, 지금 저대로 둘 수는 없잖아.”
기찬이 다시 한번 턱짓으로 사내를 가리키자, 송지연이 제 옆구리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뒤늦게 통증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으으.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일까…?”
* * *
송지연은 병원 침대에 누워서 천장에 있는 격자무늬만 가만 바라봤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상 부위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너무 많은 생각이 뒤엉켜 끊어내지를 못한 탓이었다.
생각이 돌고 돌아, 다시 기찬과의 대화로 이어졌다.
차를 타고 병원까지 오는 동안, 그와 꽤 많은 얘길 나눴고, 그때 그 말들이 자꾸 되새김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내용의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한, 또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였다.
어떤 음식 좋아해?
휴일엔 뭐하고 시간 보내?
운동 좋아해?
기찬이 주로 물었고, 송지연은 질문에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공통의 관심사나 비슷한 취향이 나오면 또 그 얘길 한참 했다.
마치 새로 사귄 친구처럼,
그게 싫었던 건 아니다.
아니, 의외로 대화가 즐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의아했다.
자신과 김종태 회장과의 관계나 김하익과의 갈등 같은, 분명 더 중요한 얘기들이 많았는데, 그런 건 일절 묻지 않았다.
‘왜 이런 대화를…?’
너무 평범한 대화라 오히려 없던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금방 경계심을 거두었다.
그를 복속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후, 그의 곁에 있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주겠다는 각오까지 한 마당이다.
당장은 손해 같아 보여도, 결국 그것이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찬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그에게 을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그리됐는지 깨닫기까지 아마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유는, 그녀가 기찬에게 심적으로 복속된 원인이 섹스에 있기 때문이었다.
섹스라는 게 때론 그런 위계질서를 만들기도 한다.
아무리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고 해도, 성욕 자체가 동물적 본성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상하 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수컷의 성기능이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보니, 그 능력에 따라 관계가 결정된다.
순전히 번식력 하나만으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 동물의 세계 아니던가.
인간도 그 본성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 없다.
건강한 신체로 밤일을 잘하면, 여자에게 사랑받고 대접받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정립된다.
서열상 나보다 위.
내 주인님, 혹은 지배자.
역사를 들여다봐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랬다.
잠자리를 지배해 세상을 움직인 남자, 혹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특히나 송지연의 경우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기찬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 종속성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런 경우 종종 비유로 드는 얘기가 바로 창기와 기둥서방의 관계다.
‘하늘이 내린 냄비’라고 불리며 보지로 뭇 사내들을 홀리는 기생이 제 기둥서방에게는 스스로 종처럼 숙이고 지낸다.
정확히 딱 들어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기찬과 송지연도 엇비슷한 관계가 성립됐다.
씹덕으로 모든 남자를 후릴 수 있다고 자부하고 살아온 그녀가 자신을 길들일 수 있는 남자를 만난 것을 인정한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에게 고분고분했고, 호의적이었고, 애정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이다.
기찬은 이런 모든 것들을 알고 의도적으로 활용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명품 대물의 맛을 보이며 길들인 이유다.
심지어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전략적이었다.
누나로 호칭하기로 한 것도 허물없이 편한 관계에서 때로는 애인처럼 설레도록 밀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아서 준다.
정작 송지연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낯설고 어색한 불편함은 느꼈다.
그 역시 본능이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걸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는 데 있었다.
‘나, 설마 걔 좋아하는 거야?’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니.
중학교 사춘기 때 국어선생님을 짝사랑한 것 말고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송지연은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묘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꾸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 입가의 미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올라 숨쉬기가 힘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쯧.’
마음 건강을 위해선 자기부정이라도 필요할 것 같아 그만 다른 생각으로 옮겨 갔다.
그러다가 불쑥 기찬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는 선수 중 실력 좋은 어린 친구 세 명만 소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애들은 어디다 쓰려고….”
의문과 동시에 가능성 하나가 머리에 팍 꽂혔다.
‘설마, 그 세 명과 즐기려고?’
기찬의 성향상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의 명품 대물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안 될 일도 아니었다.
기찬이 제 애인도 아니고,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못마땅한 마음이었다.
신기한 건, 그 못마땅함이 질투가 아닌 안타까움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먹고 싶은데.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에 송지연은 괜히 아랫배가 시큰했다.
기찬과의 섹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음부 주위가 반응하는 것만 같았다.
하아.
결국 다시 기찬의 생각으로 도돌이표가 됐다.
송지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덮었다.
갈비뼈에 금이 가고 살점이 패였어도, 그와 나누었던 섹스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몸이 그렇다는데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한심하다는 자책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친년. 그만 자자.”
하지만 그런 자책과 달리 손 하나가 팬티 안으로 들어갔다.
기찬의 벗은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