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season2. 47. 복수Ι(2)
season 2
47. 복수Ι(2)
* * *
“일단 말씀해 주신 일정에 맞춰서 훈련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찬은 김홍구 코치의 설명을 다 듣고 곧바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애초에 오명환과 총장이 다 만들어 놓은 계획이었고, 한체대에서 기찬의 개인 훈련을 적극 돕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이 훈련을 소화할 수 있겠어?”
코치가 걱정인 듯 의구심을 보였다.
아무리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해 왔다고는 하지만, 선수의 몸 관리와 같을 수는 없어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2년 전 용철이의 카운터 한방에 혼절하기도 했으니….’
기찬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섰다.
“훈련실, 둘러봐도 되나요?”
그 말에 코치도 따라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게 뭐 있겠어. 이제 네가 지내야 할 곳인데. 그리고, 이미 애들도 다 알아. 총장님이 직접 내린 지시라 군말도 없고.”
그럼에도 코치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가 않았다.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이상, 그의 걱정은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기찬도 그걸 잘 알기에 코치의 걱정을 불식시킬 필요를 느꼈다.
“어떻게, 지금 스파링 한번 보실래요?”
기찬이 여유롭게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코치는 쓴웃음만 지었다.
농담으로 들은 것이다.
“아서라. 또 기절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훈련 방향이나 현재의 복싱 트랜드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훈련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각자 훈련 중인 학생들이 보였다.
“수업 시간에도 개인 훈련 하는 학생들이 많네요.”
기찬이 놀랍다는 듯 말하자, 코치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여긴 이게 일상이지. 하긴, 넌 입학 전까지만 나왔으니, 잘 모르겠구나.”
두 사람의 대화에 가까이에 있던 학생들이 돌아봤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기찬을 알아봤다.
“쟤 성기찬 아냐?”
“어, 맞네. 프로 준비할 거라더니, 정말인가 봐.”
초고교급 선수로 모든 대회를 휩쓸었던 기찬이었기에 체급 상관없이 그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 중 하나가 불쑥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살아있었네?”
용철이가 제 주먹에 맞고 기절했던 걸 조롱하듯 건넨 인사였다.
“그러게. 내가 맷집이 약한 게 유일한 단점인데, 아직 멀쩡한 걸 보면 물 주먹에 맞았나 봐.”
기찬이 여유롭게 받아치자 오히려 용철이 발끈했다.
그러다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너, 키 컸냐?”
두 사람이 같은 체급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신체조 건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았다.
특히 고교 내내 기찬을 꺾기 위해 연구해야 했던 용철로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변화였다.
“8cm 정도.”
“체중은?”
“체중은 그대로.”
“아.”
기찬은 용철이 무심코 뱉은 탄식의 의미를 이해했다.
체중에 변화가 없다는 건 체급이 같다는 얘기다.
그런데 키는 8cm나 더 컸으니, 리치가 길어지고 높이가 높아져 상대하기 어려워졌다는 본능적인 경계였다.
“긴장하지 마. 살살 할게.”
기찬이 웃으며 용철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굴욕적이었는지, 금세 표정이 확 구겨졌다.
“서울대 갔다고는 들었다. 새끼. 공부만 해서 그런가, 비실비실 희멀겋기만 하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찬은 윗옷을 벗었다.
그러자 비아냥대던 용철이 입을 다물었다.
조각 같은 기찬의 몸에 놀란 건 그만이 아니었다.
“이야, 진짜 몸 관리 잘했구나?”
김 코치가 다가와 기찬의 단단해 보이는 등과 어깨를 만졌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찬에게 물었다.
“웨이트만 한 거야? 복싱 훈련은?”
“학교 근처에 복싱 체육관이 있어서 다녔어요. 새롭게 뭘 배웠다기보다는 감 잃지 않으려고….”
말하다 보니, 용철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벌어진 입, 미간에 만들어진 주름, 흔들리는 눈동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푸하.
기찬은 벽면의 거울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용철에게 말했다.
“나 잠깐 몸 좀 풀게. 살살 부탁한다. 전처럼 기절시키지 말고.”
“…….”
의기양양하던 용철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침묵했고, 기찬의 귀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고1부터 시작해서 3년 내내 나한테 발렸던 녀석이다. 아무리 내가 현역이 아니라고 해도, 두려울 거다.’
기찬이 몸을 푸는 동안 체육관 안에 사람이 늘었다.
그새 소문이 돈 탓이었다.
“스파링 시작했어?”
“아직, 아직인가 보다.”
기찬과 용철이 링 위에서 마주 섰을 때까지도 많은 이들이 체육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둘 다 가볍게 해 가볍게. 알았지?!”
“넵.”
“예압.”
김 코치의 신호로 스파링이 시작됐다.
왁자지껄하던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툭.
투툭.
용철은 가볍게 잽을 던지며 거리를 쟀다.
기찬은 기억 속에서 과거 그와의 시합과 그에 대한 정보들을 빠르게 훑었다.
‘이 녀석도 대학에 와서 많이 늘었겠지. 열심히 하는 녀석이니까.’
인성이나 성격은 뭣 같아도, 복싱 실력은 인정할만했다.
그에 반해 기찬은 복싱을 그만둔 일반인이다.
아무리 옛날에 날고 기었어도, 현역 선수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상대는 기찬을 가볍게 보지 않고 전력을 다할 태세였다.
‘복귀 신고는 확실하게 하고 싶은데, 잘 될까 모르겠네.’
기찬은 잡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집중했다.
그러자 용철의 움직임이 잔상을 남기듯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복서의 눈이 돌아왔다는 걸, 기찬은 느낄 수 있었다.
훅.
가드 위를 때리던 상대의 잽이 되돌아가는 그 찰나에 기찬의 왼손 훅이 따라 들어갔다.
워낙 기습적이면서도 빨랐기에, 용철은 당황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웃!”
하지만 다급한 나머지 스탭없이 상체의 무빙만으로는 기찬의 긴 리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
퍽.
정타는 아니었지만, 체중이 실린 훅에 용철의 몸이 휘청이며 가드가 풀렸다.
그리고 기찬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쉬익.
뻐어억.
가죽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용철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컥.”
글러브를 낀 두 손으로 복부를 움켜쥐고 쓰러진 용철이 마우스피스를 뱉었다.
침도 한가득 흘렀다.
꺼어, 꺽.
그가 숨을 못 쉬고 괴로워하는 사이, 얼어붙어 있던 김 코치가 급히 달려들었다.
“박용철, 괜찮냐?”
허어, 허억. 헙.
용철이 겨우 숨을 토해낸 것을 보고서야 기찬은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벗었다.
“괜찮아? 나 키 큰 거 물어보길래 리치가 예전 리치가 아닌 것 정도는 알 줄 알았지.”
너무 싱거운 승부였다는 듯 말하자 용철이 사납게 노려봤다.
하지만 아직 목소리는 나지 않는지, 대꾸는 못 하고 쿨럭거리기만 했다.
그때, 김 코치가 말했다.
“리치만 길어진 게 아닌 것 같던데?”
그 말 뒤에 다른 선수를 보며 지시했다.
“야, 형진아. 용철이 병원으로 옮겨야겠다.”
그 말에는 기찬도 놀랐다.
“코치님, 왜요?”
“아무래도 갈비뼈 부러진 것 같다.”
“네?”
기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이 새빨개져 있는 용철과 제 주먹을 번갈아 봤다.
있는 힘껏 휘두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갈비뼈가 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 이거였구나. 성기찬의 전매특허가.’
기억 속에 있던 그의 특장점이 다시 한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특기 : 양 훅.
- 필살기 : 크로스카운터.
- 장점 : 펀치력.
* * *
“그럼, 부탁 좀 할게.”
“네. 염려 마시고 들어가세요.”
기찬에게 인사를 건넨 김 코치는 병상에 누워있는 용철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나마 다행 아니겠냐. 시합 시즌도 아니고. 일단 푹 쉬어라.”
“… 네. 코치님.”
코치가 나가고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시간이 지났고, 간호사가 들어와 조심해야 할 것들을 설명한 후에야 기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의대생이잖냐. 다 새겨들어라. 간호사 누나 말 잘 들어.”
용철 입장에선 속을 긁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스파링도 엄연히 시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이라도 해야 좀 나을 것 같았다.
“닥쳐. 씹새꺄.”
그때, 누군가 그의 거친 언사를 나무라며 다가왔다.
“무슨 욕을 그렇게 하니? 친구한테.”
기찬과 용철이 동시에 목소리를 따라 돌아봤다.
세련되고 예쁜 중년 여자가 침대 옆에 다가와 섰다.
기찬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아, 텔런트 장미?!’
한마디로 ‘예쁜 중년’의 대명사로 표현되는 중견 여배우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그녀가 용철의 엄마라는 사실이었다.
“엄마, 지방 촬영이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찬의 눈은 본능처럼 빠르게 그녀의 전체를 훑었다.
‘밀프….’
꿀꺽.
그런 짐승 같은 본심과 다르게, 기찬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친구 엄마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성기찬이라고 합니다.”
장미는 키가 큰 기찬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들어오다가 코치님한테 얘기 들었어. 빠르게 응급조치해줘서 응급실 안 들르고 바로 입원할 수 있었다고.”
그녀는 정말 고맙다는 듯 기찬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예전에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더 멋있어졌네.”
기찬은 겸손을 떨지 않는다.
친구 엄마라고는 하지만, 친한 녀석도 아니고, 딱히 친해질 필요도 없는 관계라 하던 대로 했다.
“어머님이야말로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세요. 정말 예뻐요.”
그 말에 장미는 살짝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하지만 용철은 눈에서 불을 뿜으며 으르렁거렸다.
“야이, 미친새끼가!”
“왜? 내가 틀린말 했냐? 좋겠다 인마. 엄마가 이렇게 미인이신데.”
“안 닥쳐?! 윽!”
그는 제 옆구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장미는 그런 아들이 걱정되는지 얼른 돌아서서 부축하듯 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기찬은 그 잠깐 사이에도 중년 여배우의 뒤태를 감상했다.
‘오호, 관리 정말 잘했네.’
기찬은 불끈 솟는 아랫도리를 느꼈다.
순수하게 장미의 몸매나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친구 엄마라….’